소소한 일상-Daily/영화-MOVIE

그때는 그에게 안부 전해줘 そのときは彼によろしく

gowooni1 2012. 3. 19. 19:58

 

 

말도 안되는 병을 설정하는 게 일본 영화의 묘미긴 하지만 이번에도 어이없다. 어른이 되면 죽는 병보다 더 황당한 잠을 자면 죽는 병. 이 병에 걸린 사람은 한 번 깊게 잠이 들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해 식물인간으로 잠만 자다 천천히 죽는다. 고로 한 번 잠을 자더라도 선잠을 자야 하고 먹어야 하는 약도 잠이 들지 않는 약이어야 하는 것이다. 설정이 웃긴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이내 심각해지는데, 무엇보다 죽음에 대해 고찰할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한 번 잠이 들면 못 일어날지도 모르고, 그러다보면 지금 이 순간이 내 생애 마지막 시간이 될 지도 모른다. 이대로 죽어버릴까봐 두렵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욱 현재에 충실할 수 있는 삶, 잠이라는 달콤한 휴식이 주는 쾌락의 즐거움이 처음부터 배제된 삶. 게다가 이 병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병답게 불치병이란 설정이 추가된다. 이 병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는 한 여자가 한 남자의 인생에 끼어들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수초가게 TRASH의 점장인 사토시는 가게 매출의 부진으로 고심한다. 잡지에 실리기까지 했지만 수초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란 태생적 결함 때문이다. 고용된 아르바이트생까지 걱정할 정도로 손님이 없지만 사토시는 꾸준하게 자신의 가게를 지켜나간다. 눈이 내리는 초겨울 저녁 출장을 다녀온 사토시가 가게 문을 열려고 하는데 키가 훤칠한 미녀가 벤치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다. 거의 무대포로 가게에 들어온 그녀는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해달라고 하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자 급료도 필요없고 방도 필요없으니 그냥 머물겠다고 선포하고 가게 1층을 차지한다. 엄청난 미인의 포스랄까, 사토시는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여자를 받아들인다.

 

 

왠지 여자는 사토시를 아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사토시는 전혀 그녀가 누군지 모르겠다. 그러다 그녀가 해외에서도 유명한 탑모델이라는 걸 알게 되고, 그녀가 가게에 있다는 소문이 돌자 TRASH에는 갑자기 손님이 들끓는다. 생각지도 않은 구석에서 가게의 생존길이 열렸고 사토시 역시 은근히 그녀가 자랑스럽다. 어째서 자신의 가게에 그런 탑모델이 들어오게 되었는지 궁금하지만 사람이야 각자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법. 대신 그녀가 그에게 묻는다. 왜 수초가게를 열게 되었느냐고. 사토시는 어릴적부터의 소중한 약속이라고 대답뿐 자세한 내막은 말 안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뭔가를 다 알고 있는 듯한, 그러면서도 사토시의 대답에 감동을 한 듯한 웃음을 짓는다.

 

 

그렇다. 그녀가 바로 말도 안되는 불치병을 안고 살아가는, 그리고 사토시가 어릴적 소중한 약속을 한 상대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녀 목에 걸린 특이한 장식을 본 사토시는 어느 순간 갑자기 그 장식이 아홉살 적 자신의 소꿉친구에게 선물해준 프리즘이라는 걸 기억해내고, 그녀가 바로 자신의 소중하고 오래된 친구이자 첫사랑 카린이라는 걸 깨닫는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지만 카린은 지금이라도 생각해내준 사토시가 반갑고 고맙다. 왜냐하면 카린은 더 이상 삶을 버티지 못하겠음을 직감하고 생애 마지막으로 자신의 소중한 첫사랑을 만나러 온 것이니 말이다.

 

 

아홉살 그들은 3인방이었는데 마지막 남은 한 명이 아직도 화가의 꿈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화가가 되었는 지 궁금하다. 그러던 와중 그 마지막 남은 친구 유지의 소식이 전해지는데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다. 개인전을 열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던 유지가 사기를 당하고 오토바이에 치여 혼수상태에 빠져 있으니 한 번 보러 와줬으면 좋겠다는 여자친구로부터의 전갈이었던 것이다. 그 와중 이제 카린은 자꾸 졸립고 한 번 잠이 들면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다. 카린은 13년 동안이나 연락 없이 지내왔으니 이번에도 연락 없이 훌쩍 사토시를 떠나겠다고 다짐을 한다. 둘이 함께 간 유지의 병원에서 카린은 사토시에게 이별을 고한다. 자신은 이제 유지의 곁에 남을 것이며 다시는 TRASH에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잘 가라고.

 

 

그녀의 사정을 뒤늦게 알게 된 사토시는 부리나케 카린의 곁으로 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카린은 잠이 들기 일보직전이었고, 13년이나 늦은 사랑고백에도 사요나라만 말하며 깊은 잠에 빠져든다. 사토시는 결심한다. 그녀가 일어날 가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깨어날 때까지, 깨어나서 함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50년이나 진흙 속에 파묻혀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싹을 틔우는 가시연꽃도 기다리는 마당에 앞으로 자신이 살아봤자 그 이상 살라고. 기왕 기다리는거 가시연꽃와 카린 둘 다 같이 기다리기로 했다. 그 사이 유지는 여자친구와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멋진 개인전도 연다. 함께 일하던 아르바이트 생은 회계사 시험에 합격해서 떠나가고 사토시를 연모하던 동네 빵집 아가씨도 파리로 유학을 간다. 5년.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조금씩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계절이 돌아왔을 때, TRASH 앞에는 마지막으로 잠이 들었던 옷차림을 한 카린이 나타나서 예전과 똑같이 묻는다. '수초취급 전문가게 TRASH, 네 가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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