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폴 오스터의 초창기 작품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나 미국 지명에 대한 애정이 없었더라면 뉴욕 3부작은 일찌감치 덮었을거다. 지루하고, 문장의 나열에다가, 작가의 독백이라고 여겨지는 이 소설을 3부작으로 나눠서 질질 끌고 간 작가도 대단하다. 처음에는 미스터리 인가 싶어 읽다보면 작가의 내면을 고백한 심리적 작품인 듯도 하다. 3부작이니 세 개의 중편 소설이 사건이나 인물적으로 치밀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된 연작인가 싶어 보면 그것도 아니다. 그저 등장인물이나 부분적인 에피소드가 조금씩 연결될 뿐인 각각 다른 소설이다.
첫번째는 추리소설 작가인 퀸에게 이상한 전화가 걸려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퀸은, 자신이 창조한 추리 소설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재미로 글을 쓰고 그것으로 밥 벌어 먹고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몇 년 전 아내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으면서 평범한 가장으로 사는 것은 포기 했지만 작가로서 외부와 단절되어 글 쓰며 살다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럭저럭 흘러가겠지 하는 생각으로 사는 남자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외부 세상에 대해 큰 흥미도 없고 엮일 마음도 없는 삼십 대 중반의 홀아비이다. 그런 퀸에게 온 이상한 전화는 그를 다시 한 번 세상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자신을 스틸먼이라고 소개한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곧 자신을 죽이러 올 것이기 때문에 그를 감시해달라는 일을 의뢰한다.
두번째는 사설 탐정인 블루에게 한 사내가 역시 의뢰를 하나 맡기면서 시작된다. 의뢰인은 화이트이고, 그가 부탁한 사건 역시 한 사내를 감시해달라는 것이다. 블루가 감시해야 할 사람의 이름은 블랙. 화이트는 블루가 블랙을 제대로 감시할 수 있도록 블랙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건너편 아파트 중 감시당해야 할 사람의 방이 잘 보이는 곳을 임대해 주면서까지 일을 의뢰한다. 기한의 제한은 없고 어느 정도의 강도로 그를 감시해야 할 지에 대한 언급도 없다. 다만 블루의 앞으로는 매달 일정 금액의 수표가 도착하도록, 그러니까 블랙을 감시하는 동안 블루의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화이트는 최대의 배려를 한다. 하지만 블랙을 감시하는 동안 블루는 자신의 인생을 점점 잃어간다. 블랙을 감시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쉬워보이지만 그것은 블랙을 인생의 중심으로 놓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나마 가장 스토리가 있고 재미도 있는 세번째 역시 한 사람의 인생을 추적한다는 점에서 앞의 두 작품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번에 주인공이 추적해야 할 사람은 이미 세상에서 종적을 감춘 사내이다. 실시간으로 따라다니면서 감시해야 할 일이 아니라 그가 살아왔던 인생을 그가 남긴 모든 흔적을 쫓으며 부활시켜야 하는 것이다. 일주일 사이로 태어나고 이웃 사촌 지간이었던 나와 팬쇼는 어릴 적에는 커서 결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물론 둘 다 남자였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일찌감치 자아가 확립된 팬쇼를 동경하고 따르고 좋아했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으면 하고 바랐다. 팬쇼는 대학교를 2년 다니다가 어려워진 가정 형편으로 중단하고 배에 훌쩍 오른 뒤 나의 인생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나는 잡지에 서평이니 비평이니 하는 여러가지 글을 꾸준히 게재하며 사회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소피 팬쇼라는 여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팬쇼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신의 아파트로 와 달라는 것이었다.
소피 팬쇼는 예상대로 팬쇼의 아내였다. 그녀는 태어난 지 삼 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했고 당연히 아이의 아버지는 팬쇼였다. 문제는 팬쇼가 행방불명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아내를 두고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피치못할 사정, 즉 유괴나 사망 같은 치명적인 일이 팬쇼에게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실제로 팬쇼는 행방불명 된지 여러달이 지나 거의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소피 팬쇼는 나에게 자신의 남편이 마지막으로 남긴 이야기를 해준다. 생전에 돈벌이에 큰 힘을 기울이지 않은 팬쇼였지만 그래도 자신의 아내에게 남겨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시, 소설, 희곡 같은 작품들이었다. 팬쇼는 나에게 자신의 작품을 읽어보고 출판할 가치가 있으면 출판하되 수익의 25%는 나의 몫으로 돌린다고 했다.
마지막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에 앞의 두 작품과는 어느 정도 유기성을 띈다. 행방불명된 팬쇼가 두번째 작품의 화이트이자 블랙이었고, 팬쇼를 감시하던 사람 중 한 명은 첫번째의 퀸이기도 하다. 약간은 억지로 짜맞추면서 3부작이라는 이름을 갖다붙였다는 인상도 들고 첫번째가 두번째, 두번째가 세번째, 세번째가 다시 첫번째 작품의 어느 부분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키므로, 이런 형식을 흥미로워하는 사람에게는 만족스럽겠지만, 재미를 느끼지 못한 독자에게는 지루할 뿐이다. 세번째의 내가 추적한 팬쇼의 인생이 작가 폴 오스터의 인생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의 이전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쉽게 간파할 수 있다는 재미가 여기서 찾아낸 그나마 쏠쏠한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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