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아옌데의 '운명의 딸'을 보고 그녀의 문학적 세계관과 문체에 반해 버렸다. 그러니 그녀의 처녀작인 '영혼의 집'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필연이다.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이자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쌍벽을 이루는 문호라는 것은 굳이 상기시킬 필요도 없지만 다시 한 번 마르케스를 들먹인 이유는 그녀는 그와 달리 독자에게 상당히 친절한 작가임을 비교하기 위해서다.
라틴 아메리카에 위치한 나라 사람들이 후손에게 선조의 이름을 되풀이하는 관행은, 인간의 운명이란 결국 되풀이 되고 전인류의 역사란 끝없는 반복일 뿐이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는 그 같은 이름들이 끊임없이 사용되어 거의 8대에 가까운 자손들의 이야기가 얽히고 설킨다. 덕분에 독자는 책 앞에 있는 가계도를 끊임없이 되짚어가며 누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신경을 소모해야 하는데 '영혼의 집'에서는 이런 독자의 수고를 덜어준다. 작가 아옌데가 클라라가 작성하고 있는 노트의 인물을 구별해야 한다는 이유로 적어도 인물의 고유 명사만큼은 확실히 고수시켜 주기 때문이다.
'운명의 딸'을 읽으면서 어째서 아옌데가 환상적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작가인지 의아했다면 '영혼의 집'은 그런 작가의 수식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간 작품이다. 제목에서 쉽게 추측할 수 있듯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간과하기 쉬운 영혼이라는 소재를 아주 자연스럽게 다뤄서, 현실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들이 소설 속에서는 일어난다. 아름다운 로사의 동생인 클라라는 태어날 때부터 남들과 조금 다르다. 클라라는 이 세상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천상의 미모를 가진 로사만큼 예쁜 미모를 가지지 못했지만, 대신 영혼을 보고 대화하고 부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클라라는 피아노 뚜껑을 열지 않고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고 몇 미터 떨어진 의자를 움직일 수 있으며 공중에 날아다니는 영혼들과 대화를 나누고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이 탁월한 소녀다. 그래도 유전이란 무시할 수 없어 아름다운 미모도 겸비했는데 그래서 덕분에 언니 로사가 어린 나이로 어처구니 없는 실수 때문에 죽은 이후로는 클라라의 아름다움도 빛을 발한다. 그리고 언니 로사의 열렬한 구혼자였던 에스테반 트루에바의 구혼을 받아들인다.
성격이 포악한 트루에바와 클라라는 처음부터 완벽한 한 쌍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 시대 대부분 상류층의 결혼이라는 것이 그렇듯 그냥 함께 살아간다. 시대는 1920~30년 부터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이 실각할 때 까지의 1973년 여 무렵. 이 5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클라라에서 블랑카, 알바를 중심으로 작품 속 세상이 돌아간다. 페미니즘을 대표하기도 하는 작가의 성향 속에서, 화자는 비록 전지적 작가와 에스테반 트루에바의 독백이 교묘하게 교차하며 전개 되더라도 결국 이야기의 중심은 이 3~4대에 거친 여성들이다.
영적인 능력이 탁월한 클라라 덕분에 작품의 초반 분위기는 환상적이고 마술적이다. 영혼을 보고 대화를 나누는 능력이 클라라의 딸과 손녀인 블랑카와 알바에게도 전수되었으면 그런 마술적 리얼리즘의 분위기는 후반까지 지속되었을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천상의 능력은 클라라에서 끝난다. 블랑카는 엄마와 사이가 좋아도 영혼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대지주이자 극우파인 아버지 트루에바의 적이나 다름없는 공산주의자인 페드로 테르세로를 사랑하는데 여념이 없다. 분노로 트루에바가 숨어 자고 있는 페드로의 세 손가락을 도끼로 찍어내긴 하지만 이미 블랑카의 뱃속에는 그의 딸 알바가 숨쉬고 있었다.
수많은 등장인물의 연결고리가, 서사가 진행될수록 복잡하게 엉키어 가는 가운데 이 세상에서의 소명을 완수하고 클라라가 즐겁게 죽음을 맞이하면서 작품의 분위기는 그저 리얼리즘에 더 가까워져간다. 삼촌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당선과 실각을 가까이에서 본 작가답게 1970년대를 전후로 칠레 정치적 변동과 불안정했던 사회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낸다. 세계 최초로 민중 선거로 당선된 공산당 내각과 대통령의 모습, 겉으로만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누구보다 악랄하게 정권을 장악하려 했던 피노체트의 군부, 이렇게 시대적으로 혼란한 배경이 최고 상원의원으로 권력을 장악했던 트루에바 가문의 몰락과 맞물리면서 작가는 여러가지 메시지를 남긴다. 서사가 장대하고 인물이 많은만큼 그 메시지란 것도 한 가지로 요약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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