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연인-마르그리트 뒤라스

gowooni1 2010. 7. 3. 23:28

 

 

 

나이 먹는다는 것을 반쯤은 두려워하고 반쯤은 기다리기도 한다. 두려워하는 것이야 당연히 영원히 젊은 외모로 있고 싶은 마음 때문이고 기다리는 이유는 나이를 먹은 내 모습이 더 멋지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심 때문이다. 나이를 먹은 내게 누군가 다가와서 '나는 당신의 젊었을 때의 모습을 잘 알고 있지만, 지금의 당신 모습이 더 아름답군요.'라고 말해주면 기쁠 것이다.

 

[연인]은 이렇게 시작된다. 노인이 된 화자가 어딘가에서 이 말을 들은 것을 서두로 하여 자신의 어릴적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꺼낸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들이 대개 가지고 있는 함정 중 하나는 실제 있었던 일과 아닌 일들의 경계가 너무 애매모호해서 작가가 말하는 모든 사건들을 그냥 믿어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연인] 역시 다르지 않다. 

 

노인이 된 현재와 15살 무렵의 과거를 랜덤으로 넘나드는 데 거기에 현재 시제와 과거 시제의 혼용, 읽는 사람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저자 중심의 주어 생략 등은 이 작품의 분위기를 만드는 목소리다.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싶은 사건을 애매하게 감싸 넘어가는 것도, 차마 쓸 수 없는 욕설이라 쓰지 않겠다고 직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뒤라스 식의 화법인듯 한데 뜻뜨미지근 하면서도 모호함에서 나오는 몽롱한 공기가 느껴진다. 연인의 배경이 메콩 강이 흐르는 인도차이나 반도 라는 것도 몽롱함을 더한다.

 

열다섯살 반을 산 소녀가 집에서 방학을 보내고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나룻배를 탄다. 소녀는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힘들고 그녀 역시 자신이 미인이 아님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매력이라는 것이 단순히 외모의 아름다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이미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아름다운 얼굴은 없지만 다른 곳에서, 이를 테면 기지 같은 것이 자신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즉, 그녀는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열다섯살 소녀에게는 어울리지도 않게 남자 중절모에 금박이 박힌 하이힐을 신어도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가 길거리의 수많은 성인 남성들에게 유혹을 받는 이유는 또 있다. 베트남의 수많은 황인종들 사이에서 그녀는 눈에 잘 띄는 백인 소녀였다.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어머니를 따라 부임지를 끊임없이 돌아다녀야 하는 신세 때문에 식민지령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이다. 매력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되기도 전에 눈에 띄는 소녀. 그리고 그날 기숙사로 향하는 나룻배 위에서 고급 세단에 탄 한 중국인의 눈에 띄게 된다. 소녀는 한눈에 봐도 부유해보이는, 그러나 어딘지 볼품없고 빈약해보이는 그 중국인을 거절하지 않는다.

 

중국인과의 농후한 나날은, 반쯤은 미쳐가는 어머니와, 도박과 아편에 미친 큰 오빠와, 너무도 나약해서 항상 어머니와 큰 오빠의 타겟이 되어버리는 불쌍한 작은 오빠로 이루어진 이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는 훌륭한 은신처다. 그녀는 비록 어리지만 처음부터 성적 쾌감이 뭔지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열다섯살 소녀의 성적 욕구라고 말하기 힘들만큼 큰 원초적 본능으로 중국인을 더욱 매혹시킨다. 중국인은 점점 그녀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지만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수록 더욱 빠져들고 만다.

 

먼 훗날, 큰오빠만을 절대적으로 믿고 살았던 미친 엄마가 죽고, 세계 2차 대전 중 기관지 발작 중 심장이 멈춰버려 죽고, 아편과 도박과 죽이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망나니 큰 오빠가 가산을 탕진해먹고 죽는다. 그때 그녀는 이미 식민지에서 나와 파리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었으므로 가족의 최후에 대해서는 담담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