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Daily/일상-생각-잡담

사이버 포뮬러에서 배운 것

gowooni1 2009. 10. 4. 19:13

많은 사람들이 애니메이션을 '애들이나 보는 만화영화'라고 폄하하는데, 적어도 내게는 그렇지가 않다. 나는 애니메이션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격을 향상시키는데 갖추어야 할 덕목을 배운다. 노다메 칸타빌레에서는 진정 한 길을 파고드는데 필요한 의연한 자세와 정면으로 바라볼 줄 아는 용기를 배우고, 강철의 연금술사에서는 후회되는 과거를 가지고도 앞으로 나아가는 인생에 대한 책임감을 배우며, 나디아에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을 자기 삶 속에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애니메이션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화도 난다.

 

요즘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은 1991년에 제작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98년도까지 연이은 OVA로 많은 매니아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신세기 사이버 포뮬러다. 우리 나라에서는 영광의 레이서라는 다소 유아틱한 제목으로 방송되었는데 나중에는 SBS에서 OVA까지 구입하여 사이버 포뮬러란 정식 이름으로 방영했다. 그 당시는 인터넷도 활성화되지 않아 용산에 가지 않으면 좀처럼 구하기 힘들었던 OVA였는데 그걸 방송해준 SBS를 한동안 매우 사랑했던 기억도 있다.

 

 

TV시리즈의 내용은 주인공의 나이가 어리기도 하고 또 주대상이 아이들이기 때문에 우연적 요소가 다른 시리즈에 비해 많이 들어있어 역시 조금은 유치하다. 내용의 시작은 이러하다. 14세의 어린 소년 카자미 하야토의 아버지가 만든 사이버 포뮬러용 차체 아스라다를 노리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레이스가 시작하므로 시간은 촉박한데 경기장까지 아스라다를 운전해갈 사람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주인공 하야토 뿐이다. 아스라다에는 첫 드라이버로 카자미 하야토가 인식되고, 드라이버 인식시스템을 해지하기 위해선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레이스는 내일 열린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하야토는 얼떨결에 레이스에 나가 사상 최연소 레이서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전형적인 성장 플롯이다.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어린 소년이 여러 난관에 부딪히면서 좌절도 하고 환희도 느끼며 한단계씩 자기 자신을 업그레이드 한다. 그걸 함께 보는 시청자들은 주인공과 함께 환희와 좌절을 맛보며 재미를 느끼는 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류의 플롯이기도 하다.

 

6화에서 이런 대화가 나온다. 그랑프리를 하루 앞둔 하야토가 메카닉 프로그래머 마키와 한밤중에 이야기를 한다.

하야토 : 저도 코너링이 잘 안되서...

마키 : 그래서 잠이 안오는 거군요.

하야토 : 네.

마키 : 해결 방법은 간단합니다. 될때까지 연습하면 됩니다.

하야토 : 연습...하지만 지금은..(내일이 대회이니까)

마키 : 감독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느냐 입니다.

그리하여 하야토는 한밤중에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코너링 연습을 홀로 하며 결국엔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 대화에서 내가 반한 구절은 너무도 뻔하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느냐입니다'

 

최근 나 자신을 납득하는데 성공했던 작은 일이 하나 있다. 사소한 일이라 금방 잊어버리기 쉽지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는 뿌듯함까지는 잊어버릴 수 없다. 요즘 내가 연습하고 있는 건 어릴적 자주 쳤던 모짜르트 피아노 소나타들인데, 특히 쾨헬 283번, 333번에서 손가락이 멋대로 꼬여버리는 것이었다. 난 전공자도 아니고 기교적인 면에서 뛰어난 사람도 아니며 누군가에게 들려줄 목적도 없으니까 그냥 대충 쳐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계속 같은 지점에서 손가락이 꼬이며 곡이 막힐때는 정말 짜증이 났다. 평소에는 대충 넘어가곤 했는데 그랬던 심리는 바로 '난 이 지점을 완벽하게 연주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해' 일 거라는 생각을 하니 참을수 없었다. 스스로도 모르게 장벽을 만들고 있었던 셈이다.

 

그걸 무너뜨리기로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막히는 지점을 될때까지 연습하는 것. 그리고 난 드디어 그 마의 지점을 없애버리는 데 성공을 했는데 그러기 위해 소요된 시간은 고작 20분이었다. 그 부분을 제대로 쳐보지도 못하고 대충 연주하던 기간이 지난 몇년간이었음을 감안할때 20분은 어이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이 여세를 몰아 내가 하고 있는 일 전부에서 스스로를 납득시켜 보기로 했다. 한 번 될때까지 해보기로 했다. 거기에는 단 한가지의 성품만이 요구되므로 간단하기 그지없다. 인내심. 인내, 인내, 인내만 하면 된다. 얼마나 쉬운일인지. 가끔 열받을 때는 큰소리 치며 짜증 한 번 정도 내주는 센스는 잊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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