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데, 나는 높은 곳을 좋아한다. 지구 중력의 위치를 거슬러 올라간곳에서 지상을 내려다 볼 때의 그 두근거림이 좋다. 모든 곳을 다 볼 수 있는 곳에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가슴 벅찬 설렘이 느껴진다. 그 탁 트인 곳에서 느끼는 해방감이란 그곳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모를 것이다.
그러던 중 언제부터인가 그곳에서 뛰어내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자살을 하고 싶다는 충동과는 다른 것이다. 호기심은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만약 그곳에서 떨어진다면 자살하는 기분이겠지, 하는 생각 정도는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호기심이 강한 사람이라도 직접 떨어져 죽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니 정확히 말해서 떨어져는 보고 싶은데, 죽고 싶었던 건 아니라는 거다.
나처럼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번지점프라는 것이 존재했다. 어느 섬 원주민들이 성인식으로 통과의례처럼 치르기 시작했다는 번지점프를 레포츠로 개발한 사람과, 그걸 우리나라에 도입한 이름 모를 그 누군가에게 감사했다. 덕분에 우리는 번지점프를,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즐겨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일생의 몇 안 되는 [짜릿한 체험 즐기기 리스트] 중 하나에 '번지점프 하기'가 포함된지 몇 년이나 지났다.
그래도 역시 번지점프를 하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점프대에서는 해야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으로 조금만 검색해보면 나온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번지점프를 즐길 수 있는 곳은 충북 제천의 청풍호반에 있다. 가장 높다고 해도 막상 미터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62m. 맨 처음 그 숫자를 전두엽에 각인시켰을때 든 생각은 '에게, 겨우?'였다. 솔직히 62미터라면 아파트 20층도 되지 않을지 모르는 작은 숫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도의 높이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감상할 수 있는 높이이기 때문에 그리 짜릿하지 않을것 같았다.
뭐, 어쨌든 외국에 나갈 수는 없으니 아쉬운 대로 그 '한국 최고 높이'를 즐겨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뛰어난 드라이브 코스인 청풍호를 조금 만끽하고 청풍랜드의 번지점프대에 도착하였다. 2009년 8월 21일 금요일 오후 2시의 날씨는 꽤 더웠지만 그래도 일주일 전에 비해선 양호했다. 제법 바람까지 불어 주어서 시원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번지점프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었는데, 내가 도착했을 때 점프대에서 막 떨어진 사람은 나보다 약간 어려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대학생 정도 되어보였는데 그 비명소리가 너무 선명해서 사실 겁을 조금 먹었다.
떨어지는 사람들을 아래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실은 굉장히 짜릿하다. 어쩌면 떨어지는 사람보다 보고 있는 사람이 더 떨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떨어지는 사람은 비명도 안 지르는데(대개 남자들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보고 있는 우리들은 꺅, 하며 짜릿해하는 것이다.
더 이상 남들 떨어지는 거나 보지 말고 직접 체험해보기로 했다. 번지점프를 한번 즐기는 데는 4만원. 고작 몇초, 길어야 일 이분일것이다. 그 정도의 시간에 내는 비용치고는 결코 싼 건 아니었다. 하지만 기꺼이 그 비용을 지불하고 표를 구입했다. 몸에는 어떤 악세서리도 착용해서는 안된다. 귀걸이는 물론 목걸이, 시계, 팔찌 등등. 물품 보관소에 모든 것을 맡기고 체중을 쟀다. 체중을 잰 다음 몸무게에 맞는 보호벨트를 착용한 후 드디어 번지점프를 하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사실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만 해도 별로 두근거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생각하고 쳐다봐도 62미터는 내 기대치가 아니었던 거다. 오히려 무덤덤하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나를 실은 그 육중한 철상자는 매우 더디게 올라갔다. 이런 엘리베이터가 서울 고층 빌딩의 한 구석에 운용되고 있다면 당장 회수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 고층빌딩의 사정이고 여기는 번지점프를 하러 올라가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그 더딘 속도는 아무래도 일부러 그렇게 설계를 한 거다. 늦은 속도로 투명한 유리를 통해 천천히 밖을 내다보면서 지금 내가 올라가고 있는 그 위치를 한 번 만끽해보라는 설계자의 배려였던 건데, 그 배려심은 매우 유용했다. 점점 올라가면서 '헉, 이 높이를 뛰어내려야 하는 거야?'라는 공포심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번지점프를 하러 그 철대를 걸어갔다. 격자무늬로 촘촘히 엮인 바닥으로는 저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시선을 조금 멀리 두면 청풍호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면서 그 물빛에 반사되어 얼굴에 내리쬐는 햇살에 아찔했다. 눈이 부셨다. 호수의 가를 첩첩 쌓고 있는 그 푸른 산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나는 그 배경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지구의 중력 가속도9.8m/s^2로 추락해야 했다. 환불을 받을 수 없다는 서약서도 썼고 더 이상 뒤로 돌아설 수도 없었다.
허리와 다리에 맨 벨트에 고무줄 같은 긴 끈을 단단하게 연결시키고 드디어 점프대로 올라섰다. 발길이의 1/3만 남긴다음 만세 자세로 앞으로 떨어지라고, 친절하지만 직업적이어서 다소 피곤한 기색이 보이는 스태프들이 감정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매일같이 아래로 떨어지는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셈이니 별로 감흥이 없는 건 당연하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나는 죽을때까지 잊혀지지 않는 짜릿한 순간을 만들기 위해 몇 시간을 걸쳐 이 곳에 온 사람이고, 그래서 그 순간을 보다 더 제대로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그 위에 올라섰을때,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그 순간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까? 그건 공포였다. 정말 내가 여기서 떨어진다는 공포. 죽지 않는다는 것을 훤히 아는데에도 느껴지는 공포. 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결코 느낄수 없는 짜릿함 때문에 더 매력적인 공포였다. 모든 것이 그런식으로 돌아간다. 다소 부정적이더라도 그것이 있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는 것은 이것말고도 많다. 극단적으로, 인간이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 때문에 인생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부정이 주는 긍정의 힘인 셈이다. 그러니 부정을 부정할 수만도 없는게 우리의 인생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그 위에서 한 건 아니었다. 거기서는 정말 백지상태였다. 뛰어내려야는 하겠는데, 뛰어내리지 못하는 그 단순하고도 복잡한 심리상태에서도 이제 뛰어내려야지, 하는 결심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직원들에게 잠깐만요, 하고 세번 정도를 보류했다. 직원들은 너그럽게 웃으며 나의 공포를 이해해주었지만 '오히려 계속 그러면 더 무서워져요. 그냥 뛰어내리는게 안 무섭죠'라고 매우 냉철하게 말했다.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냥 내 페이스대로, 이제 뛰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드디어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디딤과 동시에 몸을 앞으로 내던졌다. 그랬다! 정말 앞으로 스르륵 하며 몸을 기울였더니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나의 몸은 중력가속도로 직하강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 발을 뗄 때는 너무 무서워서 눈을 감았다. 아마 0.5초 정도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안 될 수도 있다. 떨어지는 속도는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니 말이다. 이내 곧 '아니 이게 뭐하는 거야, 분명 눈을 뜨고 모든 것을 직시하며 즐기기로 했잖아'라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뭐랄까, 정말 내 몸은 눈 깜짝할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는데, 나는 그 순간 거꾸로 비춰진 청풍호반의 아름다운 광경을 떨어지는 속도로 보면서도 하늘을 날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떨어지는 순간을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건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경지에 가까운 환희다. 자신의 몸을 온전히 내버림으로써 지구 어느 곳에서 존재하는 그 묵직한 힘을 완벽하게 느낄 수 있다. 눈을 번쩍 뜨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 속도를 온전히 느끼고 싶어하는데 그만 내 몸을 묶은 고무 밴드가 다시 탄력을 받아 나를 위로 끌어올렸다. 아, 뭔가 아쉬웠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떨어졌을 때 나는 그제서야 비명을 질렀다. 일부러 지른게 아니라 그제야 비명을 지를만큼의 여유가 생겨 저절도 나온것 같다.
몇번의 탄력반동으로 퉁퉁 튕긴 내 몸은 드디어 아래로 내려왔다. 밑에는 고무보트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받을 준비를 하는, 역시 반복된 작업으로 인해 피곤하고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젊은 스포츠맨 타입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직업적으로 나를 받아든 그는 다리에서 벨트를 풀어준 후 물가에 나를 내려주었다. 그는 직업적이었어도 나는 그가 나를 구해준 멋진 남자로 보였다고 고백한다.
아직까지도 그 떨어지기 직전의 짜릿한 공포와 첫 낙하의 거꾸로 움직이는 풍경들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건 아마 상당히 오래갈 조짐이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갈 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던 그 순간이 정말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다. 높이가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았을텐데. 하지만 그래서 더 멋지다. 찰나라서 더 갚지다. 내게 있어 오늘의 번지점프는 찰나의 아름다움이다.
[충북 제천 청풍랜드의 번지점프대. 국내 최고 62 미터]
[자그마하지만, 인증서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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