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 1953.1.22~
한 달 전 쯤,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기획한 '7인의 음악인들' 공연을 보았다. 바이올린 둘, 첼로 둘, 피아노 둘, 비올라 한 명으로 구성되어 공식적으로는 4곡을, 앙코르 공연까지 합하면 8곡(이었나? 잘 기억이 안난다)을 공연한 작은 연주회였다. 그리고 마에스트로는 원래의 전공이었던 피아노 연주자로서 무대에 올랐다.
예매를 하지 않았으므로 공연 한시간전에 미리 가서 줄을 약 삼십분 가량 기다려 표를 구입한 후 곧장 천원짜리 팸플릿을 샀다. 시작까지는 30분이 남아서 미리 공연할 곡의 순서도 좀 보고, 거장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의 연주자들이 누군지도 천천히 보았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여자 두 명이 상당히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전도유망한 연주자들이어서 놀랐지만(하긴 그정도는 되니까 거장과 협주를 하겠지) 실제 더 놀란 건 막상 공연이 시작 되었을 때의 그녀들의 정열적인 연주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라서 그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온 몸을 향해 표출되는 것이 2층의 제일 뒤쪽에 앉아 있던 나에게까지 매우 절실하게 느껴졌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참 감동이었다.
공연 순서를 따지면 1부의 두번째 곡과 2부의 두번째 곡에서 거장이 등장하도록 되어있었는데 공연 직전에 순서가 바뀌어 2부 전부에 몰아서 거장이 나오게 되었다. 혹시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지각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오히려 잘 된것 같았다. 1부에서는 젊은 연주자들의 연주를 보고 2부에서는 거장의 포스를 느낄수 있으니 나처럼 앙상블을 즐기지 않던 사람에게는 오히려 쉽게 비교할 수 있는 기회였다.
1부는 정말 젊은 연주자들의 무대였다. 이제 막 사랑에 빠져 어떻게든 온 몸으로 표현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못 견디겠다는 듯 간절한 몸짓으로 그들의 음악을 표현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음에만 심취하지 않고 서로의 음에 맞춰가며 보다 완벽한 곡을 연주하려는 그 열정은 나를 비롯한 관객 모두에게 제법 완벽히 전달되었다. 1부가 끝났을 때, 그들을 향한 박수소리는 전달의 성공 여부를 제대로 대변했다.
15분의 쉬는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정명훈이 등장했을 때, 그 박수소리는 확실히 무게감이 느껴졌다. 음악인은 음악으로써만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듯, 마에스트로는 자신을 향한 기대가 고스란히 반영된 우리의 박수와 눈빛에 별 신경도 쓰지 않고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시작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연탄곡이었던 것 같다. 다른 한 명의 피아노 연주자와 함께 대중의 귀에 익숙한 곡을 들려줌으로서 팬서비스는 제대로 했다. 하지만 내가 감동한 건 그런 팬서비스의 차원이나 음악으로써만 자신을 표현하겠다는 의지가 아니었다. 마에스트로인 그가 왜 거장인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는 그것이, 그 공연을 본 날 밤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때 정명훈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도중에 손이 결리는 듯 몇 번씩 팔을 흔들고 손목을 돌리면서 보는 관객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그를 보기 위해 비싼 표를 사고 들어간 우리의 입장에서 그건 전혀 프로답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의 공연을 보는 이들에게 그 자세에서만큼은 완벽한 신뢰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연주를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손이 피아노의 건반 위로 올려졌을 때만큼은 그야말로 경건했다. 자신들이 연주하는 곡을 작곡한 사람의 뜻을 온전히 전달하겠다는 듯 어느 음 하나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정성스럽게 건반을 누르는 그 경건함. 미안하지만 거장과 함께 협주를 한 그 젊은 피아니스트 덕분에, 그래서 그 어린 피아니스트의 겉보기 화려한 연주와 간간히 들리는 묵음이, 음악 앞에서는 한없이 겸허해지고 종교적 경건함을 느끼게 하는 거장의 연주를 더욱 돋보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정명훈의 요리책을 보게 되었는데, 레시피를 보려는 것 보다는 그의 생각을 좀 알고 싶었다는 호기심에서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그날 본 경건함은 역시 잘못 본 것이 아니었음을 확신했다. 그는 평소 연주를 하면서 롯시니 같은 사람들을 닮기 위해, 그 종교적 경건함을 닮기 위해 많은 생각을 했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가 생각한 분위기가 그의 연주하는 손가락에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겸허한 자세에서, 스테이지를 드나들던 그 걸음걸이에서 풍겼고 그건 제일 구석에 앉아있던 내게까지, 그러니까 관람석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나는 그날 밤, 거장의 포스는 한걸음 한걸음 옮기는 그 모습과 그의 어깨에 전혀 실리지 않았던 힘, 그리고 차분함에서 나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연주야 기본이므로) 그를 닮기 위해 사람의 품격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요즘이지만, 역시 그만큼의 품격이 몸에서 배어나오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과,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무엇인가에 충실해야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통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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