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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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자(Bell Jar)는 31살의 나이로 자살한 천재 실비아 플라스의 단 한편뿐인 자전소설이다. 이 소설과 작가에 대해 잠깐 소개를 하겠다. 벨자는 호밀밭의 파수꾼과 더불어 미국에서 꼭 읽어봐야 할 성장소설로 알려져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이 콜필드로, 감수성 예민한 소년이 현실을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신의 분열을 일으킨다면, 벨자에서는 주인공이 에스더 그린우드라는 이름의 여대생이며 역시 현실과 자신과의 괴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기도와 정신병원을 오가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 소설은 실비아 플라스가 여러번 시도했던 자살기도와 정신병원에서의 치료 경험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단어 뜻 그대로 벨자는 종 모양의 유리 그릇을 말한다. 이 벨자에는 의미가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실비아 플라스 자신인 에스더 그린우드가 벨자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것처럼 삶을 답답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삶은 갑갑하고 죽을것만 같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알수 없으나 굳이 말하자면 전부가 되고 싶은 천재 소녀 에스더는 전부가 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서서히 붕괴되어 간다.
십오 년 동안 모든 과목에서 A를 받고 장학금을 따내며 대학에 입학한 최고급 엘리트 에스더는 남들 보기에 매우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19년 동안 촌구석에 살면서 잡지 한 권 사 볼 형편이 못되던 여자애가,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가더니 이런저런 상을 받고 결국 뉴욕을 휩쓸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뉴욕을 휩쓸고 다니지 못하며 여기저기 휩쓸려 다니는 처지이다. 그리고 그녀가 뉴욕에 있는 이유는 패션 잡지 콘테스트에서 문학 부문에 입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달간 뉴욕에서 일자리를 제공받고 체제 경비까지 지원 받은 것이다.
뉴욕에서의 삶은 그녀에게 허망하다. 그녀는 집에 돌아가서 수강하기로 한 글짓기 강좌에 희망을 가지며 겨우 하루 하루를 버텨나간다. 그리하여 한 달 간의 체제가 끝나고 집에 돌아갔을 때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있다. 하지만 승용차를 가지고 역까지 마중나온 에스더의 어머니는 딸에게 글짓기 수강의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소식을 알려준다. 에스더는 좌절하고,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는 상태로 여름 방학을 겨우 보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소설을 쓰기로 한다. 하지만 쓰다가 이내 자신의 경험이 소설을 쓰기엔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알고 포기한다. 다음엔 논문을 쓰기로 한다. 그러다 또 이내 포기한다. 1년간 독일에 가서 독일어를 배우는 셈치고 웨이트리스나 해볼까 생각한다. 그러나 웨이트리스 같은 것이 된다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자살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집 지하실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가 훔쳐온 엄마의 수면제를 오십알 먹고 정신을 놓는다. 그 다음 그녀가 깨어난 곳은 자기 집 지하실도 아니고 자기 방도 아니고 일반 병동도 아닌 정신 병원이다.
그 다음에는 정신병원에서 실비아 플라스 자신이 겪었던 여러가지 일들이 소설의 허구적 상황에 결합하여 잘 묘사되어 있다. 거기서 그녀는 수많은 정신병자들을 만나고 또 친구를 만난다. 친구 조앤 역시 에스더처럼 자살미수로 병원에 들어왔지만 에스더에 비해 비교적 멀쩡하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매우 멀쩡하여 외출과 쇼핑 특권까지 얻은 조앤은 어느날 갑자기 얼음연못 근처에서 발견된다. 목을 메어 자살한 것이다.
자살한 천재 시인 실비아 플라스(1932-1963)
소설에서 에스더 그린우드는 정신병원에서 정상판정을 받고 퇴원한다. 퇴원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하지만 저자 실비아 플라스의 삶에서 그 뒷 이야기를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녀는 벨자를 출판 한 지 한 달만에 두 아이들을 옆방 침대에 재우고 오븐에 머리를 처박은 채 가스중독으로 자살한다. 18세가 되기 전에 이미 400여편의 시를 쓰고 모든 과목에서 탁월한 성적을 자랑하던 완벽한 천재소녀 실비아 플라스는 결국 자기 머리 위에 놓였던 벨자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현실과 메울 수 없는 거리감에 좌절한 채 죽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