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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다?

gowooni1 2009. 7. 25. 08:26

 

 

 

캐비닛

저자 김언수  
출판사 문학동네   발간일 2006.12.21
책소개 2006년 제12화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 세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담아두는 '13호 ...

 

수많은 효율론자들이 텔레비전은 바보상자라며 그것을 쳐다보는 일은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설파한다. 하지만 정말 텔리비전은 바보상자인가? 효율론자들의 말에 따라 텔레비전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해보자. 일차적으로 각 방송사들이 망하고 그 일에 종사하고 있던 사람들이 실업자가 된다. 텔레비전 광고를 타겟으로 하던 광고회사가 망한다. 광고수입을 주로 하던 배우들도 망한다. 드라마배우도 망하고 작가들도 망한다. 매일 밤 텔레비전에 의존하는 눈 나쁜 노인들의 소일거리도 사라진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으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텔레비전에서 효율성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바보스러운 일이다. 그것의 존재 목적은 단순히 재미를 위해 있는 거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재미로 볼 뿐이지 결코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여 시청하는 건 아니다. 간혹 매우 유익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도 있지만 그것을 즐겨보는 사람들도 다큐멘터리가 너무나 흥미진진하기 때문에 보는 것이다. 공부를 하겠다는 목적으로 보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씀이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소설을 재미있기 위해 보는 것이지 결코 그 이상의 효율적인 목적을 위하여 읽지는 않는다. 만약 어떤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공부를 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면 다른 책을 읽으면 된다. 간혹 소설이 텔레비전과 같이 시간을 좀 먹는 비효율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의외로 많다) 그들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다. 효율성을 운운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찬양하는 것은 19세기 산업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이 하층민을 지배하기 위해 주입시킨 낡아빠진 생각이다. 인간은 본래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지난 몇 천년간 그렇게 살아왔다.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된다고 경고하는 문구로 장을 여는 캐비닛은 소설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톡톡히 알려주다. 다 읽고 나서 책을 덮을때 저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재미만 있었으면 됐지 뭘 더 바래? 그렇다. 캐비닛에서는 그 이상을 바라면 안된다. 그러면 철저하게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다.

 

재미는 보증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기발하게 풀어나가는 서술방식에 독자는 이내 곧 매혹된다. 아니 어쩌면 이런 상상을 다 할 수 있지? 이런 사람들이 정말 있나? 출처가 정말 존재하는 건가? 읽는 내내 독자는 의문에 빠진다. 저자가 말하는 것이 너무 진짜 같기 때문이다. 정말 그러한 출저가 있는지 당장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싶을 정도다. 다행히 친절한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정보는 창조, 남용, 오염된 것이므로 정말 믿으면 안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거짓임을 알면서도 다시 앞장으로 돌아가 한 페이지라도 읽으면 또 속는다. 저자의 능청스러운 거짓 연기에 독자 모두가 우롱당한다.

 

주인공은 13호 캐비닛을 지키는 사람이다. 대학 졸업하고 몇년간의 취업 준비 끝에 몇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어느 공기업 직원인 주인공은 이내 곧 좌절한다. 할일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가치에 의문을 느낀다. 내가 정말 이렇게 놀면서 월급을 받아도 되는 걸까? 이 신입사원으로서의 당연한 걱정을 계장한테 털어놨더니 자네의 임무는 자리를 지키는 거야, 라며 심심하면 취미를 가져보라고 말한다. 알고보니 열심히 일하는 줄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취미생활을 하고 있다. 

 

심심한 것을 참지 못하는 주인공은 캐비닛 보안 보조라는 자신의 직책을 십분 발휘한다. 보안이 필요없어 보안이라는 말이 무색한 낡은 캐비닛을 보안하기 위해 연구실로 올라간 주인공은 너무 심심해서 캐비닛의 비밀번호를 알아내려고 한다. 네자리의 숫자로 조합된 자물쇠의 비번을 1부터 9999까지 조합하여 드디어 열었다. 다행히 비번찾기는 7000번대에서 끝났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느냐면, 아까도 말했듯이 너무도 심심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열게 된 13호 캐비닛 속에서 터무니없는 자료들을 발견한다. 새끼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사람, 갑자기 시간이 몇 달간 사라지는 사람, 겨울 잠도 아닌데 몇 달간 아무것도 안 먹고 자는 사람, 고양이가 되고 싶은 사람, 혀에서 도마뱀이 자라는 사람, 등등. 믿을수 없는데도 그들은 실제로 있었다. 주인공은 무단으로 자신의 직책을 남용하여 이 특급 보안 사항을 열람한 죄로 13호 캐비닛의 이 사람들의 상담원이 된다. 남들과 다른 이 사람들을 만나며 고충을 들어주고 가끔은 터무니없는 요구도 받아주는 척하는 것이 주인공의 임무다.

 

소설은 옴니버스식으로 전개되며 각각 이 캐비닛의 사람들을 소개하는데 각 장을 할당하여 에피소드를 나열한다. 어느 장부터 읽어도 상관없을 에피소드들이 마지막에 어떤식으로 연결이 되는지를 염두에 두면 안된다. 단지 그 특이한 발상의 에피소드들을 읽으면서 터지는 웃음을 즐기기만 하는 것이 이 소설의 사용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