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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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여년에 걸친 이야기를 풀어내는만큼,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는 배경에 대한 묘사가 약하다. 대신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만큼은 상세한데, 아무래도 많은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그게 효과적이기 때문일거다.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풍경같은 것은 기대하기 힘들지만, 그 부분은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기면 삼국지를 읽는 사람들 각각의 머릿속에는 나름대로의 삼국지가 펼쳐질 것이니 이 또한 이 책의 묘미 아니겠는가.
5권 [세 번 천하를 돌아봄이여]에서는 드디어 유비에 대한 인간적 묘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4권까지 보면서, 딱히 대단할 것도 없는 유비를 작가가 한없이 감싸고 도는 모습이 매우 못마땅했는데 이제 조금씩 유비의 '사람 끄는 힘'에 대한 정체가 드러난다. 5권에 등장하는 유비는 어느덧 48세의 지천명을 앞둔 나이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자신의 기업基業을 일구지 못하고 남에게 자신과 가솔들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조조가 가장 두려워하는 라이벌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그 모습이 한심스럽기 짝이 없고, 유비라는 그릇의 크기도 심히 의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신을 '천하의 제왕'이 될 사람으로 믿는 유비를 보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솟구치는지 참 신기하다. 아무런 근거지도 없고, 재물이 많은 것도 아니고, 주변에 걸출난 인물이 많은 것도 아닌 유비가 한결같이 자신의 됨됨이에 터럭의 의심도 없는 것을 보면 그 믿음의 근거를 알고 싶어진다. 물론 유비는 어딜가든 자신이 다스리는 곳 백성들의 신의와 충성을 두텁게 사고, 또 모든 이들이 그를 따르지만 그런 인간적 매력이 '제왕'으로서의 자신감 근거가 되기에는 불충분하다.
그런 그가 드디어 사람을 구하는데 앞장을 선다. 관우와 장비라는 든든한 두 아우는 아무래도 모사謀師가 되기에는 배우고 생각하는 바가 부족하며 자신 또한 머리를 잘 쓰는 인물은 아니다. 천하를 제패하는 영웅들의 전쟁이 난무하던 시기라고는 하지만 병법의 이용이 널리 퍼진것도 아니고 마구잡이 살육이 대부분이었던 시기라, 조금만 머리를 써도 적은 숫자로 많은 수를 이길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 있는 때에 두뇌, 즉, 브레인이 반드시 필요한 때였다. 유비가 조금만 그것을 일찍 깨달았어도 얼마나 좋았을까. 오십줄을 바라보는 시기에 겨우 서서(서원직)를 만나 병법을 사용한 전쟁으로 조금씩 승리를 거두어가고, 유비는 서서에게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보내지만 조조의 꾀로 서서를 빼앗긴다. 그러나 서서는 제갈량의 극적인 등장을 위한 전주곡이었을 뿐이다. 서서의 일러줌으로 인해 진정한 시대의 모사였던 제갈량(공명)이 드디어 등장한다. 최고의 책사 제갈공명. 왜 여태 그가 등장하지 않을까 하고 의아해하던 찰나에 드디어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말을 등장하게까지 하면서 와룡臥龍인 그가 세상에 나온다. 마흔 여덟의 지극한 나이인 유비가, 겨우 스물 일곱의 청년에게 자신의 브레인이 되어주길 빌며 추운 겨울에 세 번이나 왕복하게 한 모습이 참으로 감동을 준다. 이제 알았다. 유비의 인간적 매력은 바로 감동이다. 감동을 잘하여 걸핏하면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그만큼 남들에게 감동도 잘 준다. 인간이 가진 최고의 무기는 이성이 결코 아니라 감성이고, 이 둘이 부딪히면 결국 감성이 이긴다. 이성적으로 용납할수는 없어도 감성적으로 용납이 되면 모든 것이 용납되는 것이 바로 사람 마음 아니던가. 조조가 이성적으로 계산을 해가며 실리를 추구하는 정책을 폈다면, 유비는 감성적으로 이해타산 없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다스림을 펼쳤다. 조조가 온갖 세금 감면등으로 백성의 마음을 사려고買 했다면 유비는 인정으로 백성의 마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근거지도, 세력도, 그 어느것 하나 변변하기 갖추지 못한 유비를, 천하를 제패하고 있던 조조가 가장 두려워한 이유이기도 하다.
5권을 보면서 '이건희 개혁 10년'이 참 많이 겹쳤는데, 삼국지를 보고 그 책을 본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던 나는 그 책이 얼마나 삼국지를 많이 패러디했는지 이제야 알게되어 웃음이 나왔다. 이 회장이 실리를 중시하고 학벌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인재의 채용을 추구했다는 부분 또는 논공행상 등은 조조의 정치철학을 그대로 따라했으나, 감동을 주는 경영을 중시하고 좋은 인재가 있으면 그곳이 지구 반대편이라 해도 몇번이고 비행기를 타고 가서 만난 삼고초려 부분은 유비의 철학을 구했다. 고전을 철저히 이용한 기업경영철학이었음을 너무나 뒤늦게 알게되어 부끄럽지만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그래도 여전히 유비는 나의 마음을 이끌지 못한다. 제갈량이 서서에게 말했던 것처럼, 유비는 지나치게 인정에 이끌리고 성과가 매우 더디거나 미흡하다. 사실, 천하를 제패하기에 적당한 인정과 매정함을 겸비하고 있는 사람은 조조다. 그가 이뤄내는 성과도 적당한 속도이다. 아직까지 유비를 보고 있으면 답답한 마음이 드는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속단하기는 이르다. 결과적으로 봤을때 유비가 결국 승자일테니, 어찌하여 유비의 성품이 천하를 제패하게 만들었는지를 관심가지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나 역시 아직까지는 조조예찬적인 마음이 더 크지만, 결국 유비같은 인정과 감동을 바탕으로 한 철학이야말로 진정한 승리를 이끌어낼수 있는 것이라고, 나관중이 조금이라도 빨리 나를 설득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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