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Daily/일상-생각-잡담

자기만의 사전

gowooni1 2008. 9. 19. 10:47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자가 남자에게서 벗어나 진정 독립적인 자아를 확립하며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건 벌써 100년 전 이야기다. 양차대전으로 전 세계가 흉흉하던 시기에는 그런 조건을 가진 여성들이 드물었을 테지만 지금은 21세기이다. 곳곳에 울프가 말하던 필요충분조건을 태어날때부터 가지고 있는 여성들로 넘쳐난다. 세상이 그만큼 살기가 편해졌다. 어느 정도의 부는 부가 아니라 최저생계조건이 되어버렸다.

 

그럼,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 독립적이지 못한 여성이 많은 이유는 뭘까? 물론 세계는 변했고 여성의 사회적 위상도 한층 높아졌지만, 기본적으로 여성은 아직도 남성 의존적인 경향이 짙고, 1세기 전과 비교해봤을 때, 별반 나아지지 않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 나는 이 이유를 물질적인 것에서 보다는 정신적인 것에서 찾고 싶다.

 

 

자기만의 삶에 대한 철학의 부재. 이게 근본 이유 아닐까? 현재 대한민국 20대를 보면, 자기만의 철학을 확립하기에는 삶의 조건이 너무나 척박하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게 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등에 떠밀리듯 졸업을 하고, 취업 준비에 온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 이런 세태는 88만원 세대라는 책까지 나오게 만들었고, 이 책이 불티나게 팔린 것을 보면 20대의 상황이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진정한 현실로 자리 잡았다는 뜻 일거다. 취업 준비에 꽃다운 20대를 다 소진해버리다 보면 30대가 된다. 나름 취업에 성공해서 생활의 기반을 잡은 사람들은 이제 다시 등에 떠밀리듯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그게 가장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고, 남들보기에도 번듯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 여성들은 어떻게 되는가? 현실적으로 일하면서 육아를 하려면 벅차다. 당연히 남자에게 기댈수밖에 없다. 남자는 다행히도 자신의 처자식을 위해 안락한 보금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돈을 벌어다 준다. 그러면 그럴수록 여자는 남자 의존적이 된다.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현실이 그렇게 만든다. 또, 드라마도 반복적인 가부장적인 요소들을 대중들에게 세뇌시키는데 한 몫한다. 실제로 요즘 방송하고 있는 드라마의 기본 가치관이, 내가 코흘리개적 엄마 옆에서 봤던 드라마와 비교해 봤을 때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참으로 경악했던 기억이 난다. 세상은 급진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왜 사람들의 생각관은 크게 바뀌지 않는 걸까하고 의아해 하고 있던 중 절반은 드라마에서 해답을 찾은 셈이다.

 

나는 자신에 대한 삶을 고찰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설프게 필요한게 아니다. 정말 물리적으로 절대적인 시간이 요구된다. 정 시간이 되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고 잠을 안자더라도 요구된다. 그런 시간을 자기에게 들이다보면, 어느새 자신 의존적인 사람이 되어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외부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더라도 정신만큼은 독립적인 자신이 되면, 자아를 확립하며 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울프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라는 요소에 나는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자기만의 사전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은 건데, 참 멋진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하는 자기만의 사전이란 게 별 것은 아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무엇이고, 나는 이것을 어떤 이유에서 좋아하며,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적어보면 되는거다. 내가 생각하는 컴퓨터란 어떤 물건인지, 내게 있어 침대는 어떤 존재인지, 집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수첩은 어떤 식으로 정의내릴 수 있는지, 책이란 내게 어떤 물건인지, 친구란 어떤 존재인지,향수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 내리고 싶은 철학은 뭔지 등등. 그냥 주위에 보이는 사소한 것들에 나만의 이름과 정의를 내려보는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지 않은가. 향수는 그냥 향수일 뿐이야, 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내게 있어 향수는 삶을 향그럽게 하고, 내가 지나가는 자취를 싱그럽게 만들며, 일상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드는 거야, 라고 말한다면 멋지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주위에 자기만의 정의를 구축해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에 대한 철학도 보다 명확히 다질 수 있을테고,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 특히 시간과 일에 쫓겨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마음의 공허함을 더 메꿀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그런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나름 재미있다. 뭔가 내 삶이 정립되는 느낌이고, 나만의 언어로 재탄생되는 정의들이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기분이다. 그리고 나도 나폴레옹처럼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내 사전에 포함시키지 않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