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2008.08.25-말테의 수기-라이너 마리아 릴케

gowooni1 2008. 8. 25. 21:36

내가 시인 릴케에 대해 관심을 크게 가진 계기는 그의 시가 좋아서가 아니라, 시인이 사랑했던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에 관하여 알게 된 후 건너건너 알게 되었다. (나는 시에 대해 아는 편이 아니고, 또 독일 시인의 시를 좋아할 만큼 독일어에 능통하지도 않다.) 36살의 살로메는 22살의 릴케를 만나 (남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처음으로 사랑에 빠졌었다. 물론 릴케도 그녀에게 흠뻑 빠졌다. 2년간의 열애 끝에 루의 일방적인 이별통보에 힘들어 하던 시인은 51살의 나이로 죽을때조차 루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원래 릴케를 먼저 알고 있긴 했다. 문학사적으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름을 떨쳤으나,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는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은 아니었으니까.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는 22살의 나이에 니체와 그의 친구 레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이루며 사랑의 줄다리기를 했다. 루와의 결별로 충격을 받은 니체는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그의 유명한 책을 썼고, 그 비하인드 스토리로 인해 루는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중년에는 릴케와의 사랑을, 말년에는 프로이트와의 사랑으로 유명하고, 그녀를 싫어했던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는 루를 마녀라고 칭하며 악랄한 비난을 쏟아부었다. 그런 매력적인 여자와의 사랑을 했던 상대들에 대한 호기심덕분에 릴케에 대한 호기심까지 발동하게 된 것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감수성을 가졌으며, 어떤 작품을 썼을까.

 

어릴적 고전소설을 한번 다 읽어봐야겠다는 미명하에 내 용돈으로 말테의 수기를 구입했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재미가 없어서 열 댓번의 시도 끝에 결국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이 소설은 정말 재미가 없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내용이 없고 순전히 묘사만 잔뜩 나열되어 있는 지라 뭔가 줄거리를 기대하고 보면 절대 안된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나 재미없는 소설이 명작이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었다. 세상에 저절로 읽히는 소설과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소설 두 종류가 있다면, 말테의 수기는 집중해서 읽어도 읽히지 않는 소설이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책에는 언제나 때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읽어야만 그 효과가 배로 상승이 된다. 현재, 2008년의 내가 본 말테의 수기는 그 어느때보다 잘 다가왔다. 그 어릴때 봤을 때는 몰랐던 소설의 배경, 소설 속 주위의 묘사, 주인공 말테의 내면 묘사, 과거의 회상에 대한 묘사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왜 어릴적에는 소설의 배경이 파리였는지 몰랐으며, 릴케의 묘사력이 무척이나 뛰어나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관심이 없을 때와 있을 때의 받아들이는 속도는 정말 다르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은 여행같이 외부세계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책과 같은 내면 세계에서도 적용되는 법이다.

 

28살의 주인공 말테가 파리를 묘사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묘사하는 파리의 분위기는 결코 낭만적이지도 않고, 세련되지도 않다. 그저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살고 있는, 지저분하고 여기저기 죽음이 우울하게 산재한 대도시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 분위기는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파리에 대한 이미지가 무척이나 열악한 모습으로 연상된다. 특히, 가난하고 목적없고 꿈도 없이 여행하고 있는 말테의 입장에서 쓰여진 수기이기 때문에 더욱 우울한 기분으로 묘사되어 있으리라. 그는 말한다. 나는 지금 보는 것을 배우고 있다라고. 그가 말하는 보는 것을 배움은, 아마 주위를 자세히 관찰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게 해서 수기는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가 보는 파리의 여기저기가 묘사되어 있으며, 간혹 주인공의 어릴적 사건들에 대한 묘사를 중심으로 소설은 구성된다. 그리고 이 주인공은 28살의 말테이지만 35살의 릴케가 자신의 젊은 날을 회상하면서 쓴 소설이다. 릴케는 이 소설을 다 쓰고 난 이후에 더 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로 그의 허탈감을 표현했으며, 실제로 그 이후 12년간이나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 그는 이 소설을 향해 그의 모든 글에 대한 에너지를 쏟아부었음에 틀림없다.

 

실제로 릴케의 감수성은 무척이나 예민한 것 같다. 일생을 시상을 얻기 위해 여행을 거듭하였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쓸 준비가 되지 않으면 절대 쓰지 않는 그는 진정한 시인, 언어의 예술가 이미지다. 일생을 거쳐 엄청난 다작을 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데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것에 휩쓸리지 않았나보다. 릴케는 유일하게 딱 하나의 장편소설을 썼고, 그게 바로 말테의 수기인 것이다. 이 소설이 릴케의 단 하나뿐인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왜 이 책이 다른 책들에 비해 더욱 가치가 있어보인 것일까.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시인의 글솜씨는 인정하지만, 내게는 지금 읽어도 재미있지는 않은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