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라따뚜이'를 보면 천재적인 미식가의 혀를 가진 생쥐 '레미'가 나온다. 레미는 믿을 수 없게도 '살기위해' 먹는 다른 쥐들과 다르게 '보다 제대로' 맛을 음미하기 위해 먹길 원한다. 이 맛과 저 맛을 혼합하면 환상의 맛이 나올 것임을 직감하는 레미는 결국 요리사(를 조종하는 생쥐)가 되어 보다 풍부한 맛의 세계를 탐색하고 탐닉해 나간다.
이 생쥐는 내 인생을 한 번 돌이켜보게까지 만들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먹는 것을 귀찮아하는 편이며 그래서 가끔은 배고픈 상태가 왜 이리도 자주 돌아오는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당연히 요리는 더욱 귀찮은 일이다. 요리를 하면 집에 냄새도 가득 차고, 습도도 높아지며, 제대로 뒷정리를 안하면 음식 냄새를 맡은 벌레들의 습격을 받아야 하고, 더군다나 설거지감도 잔뜩 나온다. 그런고로 가능한 한 조리과정이 간편한 인스턴트를 선호하며 가급적 나가 사 먹는 것을 좋아한다. 배달음식은 조리과정이 생략되지만 뒷정리도 생각보다 귀찮고 쓰레기도 많이 나오기 때문에 나가 사 먹는 것이 가장 속편한 일이다.
이렇게 점철된 내 인생에서 요리가 우선순위로 떠오르게 만든 사건은 역시 아이다. 이제 7개월차가 된 아기는 이유식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아직은 분유가 더 좋은 모양이다. 그래도 6개월 이후부터는 고기를 통해서 철분도 보충해줘야 한다고들 하니까 여러가지를 시도해보았다. 쇠고기, 닭, 사과, 고구마, 당근, 단호박, 감자 등등. 내가 만들어준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길래 시중에 파는 거버도 먹여보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결과 이 아이는 단 것을 위주로 좋아하고 고기와 채소는 그냥 먹는둥 마는둥 하며 녹색채소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슈퍼푸드인 브로콜리는 먹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트에서 싱싱해보이는 브로콜리를 두송이 사왔다. 사실 브로콜리, 나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한번도 데쳐본 적도 없고 손질해본적도 없다. 그럼에도 아이에게는 먹여줘야겠다는 사명감에 브로콜리를 손질하고 데치고 블렌더에 갈아서 불려놓은 찹쌀과 삶아놓은 닭가슴살을 함께 넣고 다시 한번 갈아 열심히 끓였다. 중기 이유식 식단 중 대표적인 메뉴로 나오는 것이 바로 이 닭고기 브로콜리 찹쌀죽이기도 하다. 그렇게 몇시간을 들여 열심히 만든 이 죽을 아이에게 한 입 먹였을때 그렇게 격렬하게 거부하며 울 줄은 몰랐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가 싶어 기분 좋은 상태를 봐가며 두 번을 더 시도하였으나 매번 격렬하게 얼굴까지 쌔빨개져가며 싫다고 우는데, 아,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먹여야 하나 싶어서 관두기로 했다. 내가 한 입 먹어보니 윽, 세상에 이렇게 맛없는 음식도 없다. 이렇게 맛없는걸 건강에 좋다고 입에 우겨 넣으니 당연히 싫지. 레미. 도와줘. 너라면 이 맛없는 브로콜리를 어떻게 해서 맛있게 먹을거니? 나의 냉동실엔 손질해놓은 브로콜리가 잔뜩 있다고.
이것저것 찾아보았다. 브로콜리 퓨레라는 것이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해 먹이지 않는 것 같지만 외국 사람들은 해 먹이나보다. 브로콜리 감자 퓨레도 있었는데, 이 아기는 감자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보나마나 악을 써가며 거부할 것이다. 순수하게 브로콜리의 맛을 느끼게 해주면 좋아할까? 오늘 아침, 끓여 식힌 물을 넣어 브로콜리 퓨레를 만들어 주었으나 냄새만 맡고 거부하였다. 그래, 내가 먹지 않을 음식이라면 아이에게도 주지 말아야지. 세상에 맛있는 음식은 얼마나 많고 인생은 얼마나 짧은데 굳이 몸에 좋다고 맛없는 음식을 먹이느냐는 말이다. 그러다가 사과 퓨레를 해주기 위해 엊그제 사 놓은 부사가 눈에 띄었다. 브로콜리와 사과? 왠지 궁합이 어울리는 조합같지 않니, 레미? 즉각 사과를 깎고 얇게 썰어 끓는 물에 2~3분 데친다음 만들어놓은 브로콜리 퓨레와 섞어 사과 브로콜리 퓨레를 만들었다. 한 입 먹어보니 역시, 달달한 사과와 푸릇한 브로콜리의 향이 그렇게까지 악취는 아니다. (사실 닭고기 브로콜리 찹쌀죽은 냄새부터가 먹기 싫을 정도였다) 오히려 상큼한 느낌이 잘 살아나는 조화같다고나 할까? 이 정도라면 아이가 거부하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을만큼은 되겠다.
이유식을 만들면서 각종 음식 재료들의 궁합과 맛의 조화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하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기껏해야 술과 안주의 궁합에 대해서나 생각했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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