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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게 라이프 - 마이크 비킹

gowooni1 2017. 11. 8. 15:50




친하게 지내는 언니와 남양주 근교로 나가 콩요리를 먹고 갈대밭이 보이는 한강가를 거닌 다음, 저녁 노을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가을 단풍 가로수를 보며 서울로 돌아오는 중, 언니가 내게 물었다. 뜬금없이 물어본 건 아니었고 어떠한 맥락이 있었는데 그 질문의 인상이 강력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요?"

갑자기 마주친 고차원적인 질문 앞에서 평소의 나라면 제법 당황했을 법도 한데, 붉은 빛 내뿜는 가로수 탓이었을까.

"그냥...이렇게 살고 싶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강이 보이는 곳에 집을 짓고 좋아하는 사람들 초대해서 맛있는 음식 먹이고, 얘기하고, 술도 같이 한잔 하고... 여름에는 바베큐 파티도 열고, 겨울에는 스키장에 다니고. 아, 집에 벽난로가 하나 있으면 더 아늑할 거 같아요."


어느 순간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게 되었다. 엄청난 욕망의 덩어리였던 20대의 나는 '되고 싶은'것이 많아서 항상 불안했고 불만족스러웠고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고만 살았었는데, 언젠가부터 이러한 것들이 부질없는 것으로 다가오면서 욕심을 하나 둘 씩 내려놓게 되었다. 무언가가 되려는 대신 현재와 오늘을 행복하게 살 수만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았다. 갑자기 너무 마음이 늙어버린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면서도 이런 상태에 만족하는 나날이 늘어나면서 그런 걱정조차 부질없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현재 주어진 이 순간에 감사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시간을 채우는 삶의 방식이 내게 주어진 인생을 가장 가득차게 만드는 방법인 것 같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런 생각에서도 변하고 발전한 것이 있다면 거기에 '사람'을 채워넣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 시간을 채우고 싶어진 것이다. 


언젠가 초대를 받아 참석하게 된 파티의 인상이 강하게 남은 탓도 있을 것이다. 단순한 홈파티였고 음식이라고는 소박한 정도에 불과했지만, 집주인 내외가 초대한 사람들끼리 조용히 모여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꽤나 신선했다. 나는 그 자리에 처음 참석했지만, 이미 모인 사람들끼리는 돌아가면서 서로의 생일에 초대도 하고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낸다고들 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초대를 한 집주인도 한 상 가득 뭔가를 차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전혀 없었고, 초대받아 온 사람들도 그냥 좋은 사람들끼리 시간을 보낸다는 것에 의의를 두며 방문했다는 것, 또한 그들의 인간관계가 직장 또는 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순수히 친목 도모에서 시작하여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인다는 것. 그야말로 함께 편안하며 안락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모인 '휘겔리'한 시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을 초대해서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도 한잔 기울이며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삶이라니, 정말 근사하지 않은가 말이다.


아마 이런 생각에 더욱 심취하게 된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억지로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데에서 오는 중압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들, 나와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들 하고도 적당히 선을 그어가며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그것이 바로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하는 어른의 삶이라고들 하니까 그렇게 살기는 하는데, 아무리 선을 긋고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그게 마음처럼 되지도 않는 것이 인간관계이니 말이다. 하지만 또 어떻게 생각해보면,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억지로 맞추며 보냈던 그 시간의 힘겨움이 남아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들하고만' 갖는 자리가 더욱 소중하게 가치있게 다가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바뀐 최근의 생각 덕분에 '휘게 라이프'에 관심이 생겼나보다. '휘게 라이프'라는 책은 이미 나온지 1년도 더 되었고 그 개념은 더 오래되었지만 작년까지도 나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는데, 최근 서점에서 이 책을 보는 순간 '편안하게, 함께, 따뜻하게'라는 표지의 문구에 꽂혀버리고 말았다. 그냥 편안한 삶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이 책에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덴마크의, 행복연구소장이라는 사람이 연구한 행복한 삶을 위한 방법이라면 그래도 한 번 읽어볼 만 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몇 번 훑어보고는 소장용으로 결정했다. 


진리는 단순하고 이미 표지에서 예상했다시피, 덴마크 사람들도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휘겔리한 시간이란다. 벽난로가 하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비록 벽난로가 없어도 양초의 촛불로 색온도를 한껏 낮춘 아늑하고 어두운 조명 아래서 좋아하는 사람 서넛과 뜨끈하게 데운 멀드 와인 혹은 코코아를 마시며 편안하고 안락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덴마크 사람들이 생각하는 휘게라이프의 이미지다. 여기에서 휘겔리함을 더할 수 있는 조건 하나 더. 밖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건,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있으면서 받은 중압감이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들하고만 있을 때의 시간이 훨씬 소중하게 여겨지는 논리와 일맥상통해 보인다. 무언가가 소중하게 여겨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과정에 수고스러움이 반드시 함께 녹아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