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북리뷰입니다. 최근 들어 예전만큼 책을 많이 읽을 여유도 없어졌지만, 그래도 짬을 내어 읽은 몇몇 책들이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잠시 책 읽는 재미를 잃었습니다. 모처럼 읽은 로맹 가리의 '별을 먹는 사람들'은 그 문장이 여전히 로맹 가리 답게 읽을만 했지만 세계대전 전후 남미 정치적 배경이라는 것이 아무리 읽어도 재미가 없었고, 좀 속도 있게 읽을 수 있을까 싶어 읽은 하루키의 '애프터 다크'는 속도 있게 읽을 수 있긴 했지만 뭔가 알맹이가 없는 기분이 들어 시간 투입 대비 만족감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도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지만 최근에 읽은 '남아 있는 나날'이 뭔가 저와 주파수가 맞지 않는지 아무리 읽어도 지루하기에 덮어버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유하는 화가'에 도전해 본 건, 이시구로의 '녹턴'에서 받았던 감명을 다시 한 번 더 느껴보고자 하는 일망의 희망이었달까요.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성공적입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가장 만족도가 높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이 작품이 주는 감명은 제가 원했던 '녹턴'의 그것보다는 이시구로의 또 다른 작품, '창백한 언덕풍경'과 비슷합니다. '창백한 언덕풍경'을 읽은 지 꽤 오래 되어 그것이 주는 인상만 어렴풋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읽으면서 중간중간 '창백한 언덕풍경'과 분위기가 많이 닮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저 혼자만의 느낌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 본인 역시 '창백한 언덕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있는 나날'이 다 같은 작품이라고 스스로를 약간 자책하면서 말했다고 하네요. 파리 리뷰 인터뷰에서요.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시점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시작합니다. 한때 유명한 화가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던 마스지 오노라는 노화가의 입장에서 모든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마스지 오노는 아내도 세상을 떠나고 첫째딸도 시집을 보낸 후 둘째 딸 노리코와 단 둘이 커다란 저택에서 살고 있는데 한가지 걱정이라면, 혼기가 꽉찬 노리코와의 혼담이 생각보다 쉽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는데 작년에 혼담이 진행되었던 집안과는 막바지 과정에서 결렬되었고, 지금은 유명한 예술가 사이토의 아들과 혼담을 막 시작한 단계입니다. 첫째 딸 세쓰코는 은근한 은유와 직접적인 압박으로 아버지에게 노리코의 혼담이 작년과 실패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강구합니다. 혼담의 장본인 노리코 역시 대 놓고 아버지에게 반감을 표하며 자신의 혼담이 작년처럼 무산된다면 그것은 노력을 하지 않는 아버지 탓이라고 말합니다. 불안을 느낀 오노는 자신의 옛 지인들을 찾아가며 자신의 뒷조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해주기를 바라는데 이 과정에서 오노가 걸어온 길이 회상의 형태를 취하며 다가옵니다. 오노는 젊은 시절부터 유망했던 화가입니다. 잘 그리면서도 빨리 그리는 능력 덕분에 그림을 그려 파는 작업실에서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그 재능이 눈에 띄어 들어가게 된 모리 선생 문하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어느 구성원 사이에서건 약간 굼뜨고 느린 존재가 있기 마련인데요, 오노의 주위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별명은 거북이로 꾸준하고 착실하게 일을 하기는 하지만 작업량이 턱없이 부족해서 동료들에게 놀림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었죠. 오노는 그런 거북이 같은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 부족한 능력 때문에 동료들의 놀림감이 되는 것은 좀 견디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놀림을 받는 난처한 상황에서 거북이를 구해준 몇몇 상황들 때문에 거북이는 점점 오노를 의지하고 존경하고 따르게 되지요. 거북이는 장인의 집에서 나와 모리 선생의 수하로 들어가는 모든 과정까지 오노와 함께 하고, 모리 선생의 집에서도 오노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며 늘 자신이 따라잡아야 하지만 따라잡을 수 없는 사람으로 대우합니다. 모리 선생의 화풍은 그간 세상에서 유행하던 예술적인 작품과 좀 다릅니다. 두꺼운 외곽선이 유행하던 그 시대에 얇은 외곽선을 고집하며 환락의 세계, 환락의 여인들을 그리는 데 집중합니다. 그런 작품을 그리려면 환락가에 많이 가야하고 환락의 세계를 자주 경험해봐야 하겠죠. 모리는 자신의 수하들이 자신과 같은 화풍을 그리도록 장려하며 숙식을 제공하고 그림을 그리는 모든 재료들을 제공합니다. 거기다 환락의 세계를 경험하는 비용까지 제공하지요. 그 정도로 모든 것, 자신의 가르침, 영향력, 경제적인 모든 것을 제공하는 위치에서라면 당연히 문하생들이 자신의 화풍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수제자들이 자신의 화풍을 고집하며 반기를 들 때 그것을 배신이라 생각하며 떠나도록 종용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드디어 오노가 모리 선생의 가르침에 반기를 드는 날이 찾아왔습니다. 세상은 전쟁과 열강과 식민지 쟁탈에 대한 열망으로 들썩이는데 여전히 하룻밤의 즐거움, 아침이 되면 사라져버리고 마는 환락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데 차츰 진력이 나기 시작했던 겁니다. 게다가 그 무렵 만난 마쓰다는 그런 예술가들의 행태, 세상과 무관한 듯 실 생활과 별 가치도 없어 보이는 그림을 그리느라 세월을 축내고 있는 그런 자세를 맹렬히 비판합니다. 마쓰다는 자본주의로 돈을 앞세운 기업과 열강들이 배불리 살아가고 있는 현 세태의 문제점을 말하며 천황의 위치를 절대적으로 복구시켜 세상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일조해야 한다고 오노를 설득합니다. 오노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신념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지만 거북이에게도 비난을 받고 모리 선생에게도 쫓겨납니다. 다행히 세상의 흐름은 오노의 편이었던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화가로 자리를 잡고 각종 상을 타며 생활의 안정을 찾습니다만,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세상의 흐름이 뒤바뀌자 전범으로 전락하여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대상이 되고 맙니다. 오노에게는 복합적인 면이 존재합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떳떳하다며 세상을 설득시키지도 않지만, 시대의 흐름에 자신의 신념을 꺾고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사람보다 신념대로 행동하고 그것을 지켰던 행동에 대해서는 약간의 자부심도 느낍니다. 자신이 한 짓에 대해 잘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날 자신이 취했던 신념을 지키던 방식이 옳았다고 말하는 것이기에 오노가 그르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그는 노리코와의 맞선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오노의 용기 덕분이었던지 사이토 가문의 호감을 사는데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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