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우리는 면접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 : 누구를 가장 존경하냐는 질문엔 뭐라 답할거야?
너 : 음...나는 '천재 유교수의 생활이라는 만화의 주인공 유택을 가장 존경합니다.'라고 말할래.
나 : 만화? 참신하긴 하다만... 고지식한 면접위원들이 좋아할 대답일까?
너 : 왜? 거기 나오는 유교수는 고지식하기 그지없지만, 자기만의 원리원칙에 충실하고 어줍잖은 타협을
거부하는 매력이 있는 사람이야.
나 : 그러니까, 그건 그 만화를 본 사람들이야 알 수 있는 거잖아.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의 면접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하냐'는 피상적 물음은 나오지 않았고, 그녀는 무난하게 합격을 했다.
이효재의 서재에서 또 한 번 '천재 유교수의 생활'을 발견하고, '오옷, 이건 반드시 읽어보라는 일종의 계시일지도 몰라'라며 즉시 인터넷에서 지금까지 발간된 전권을 구매했다. 아직 완간된 것이 아니니 한 번 구입하면 계속 구입해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양해해주지. 한 번에 구매하니 거의 뮤지컬 티켓 수준이다. 뮤지컬의 세시간 플레이보다 훨씬 많은 시간에 들테니 감가상각은 느긋하게 할 수 있겠다.
그런데 1권을 읽고, 2권을 읽어도 도무지 재미있는지를 모르겠는 거다. 제목은 내용에 충실했다. 정말로 '천재 유교수'라는 작자의, 말보다 행동으로 보이는 생활을 그려낸 것이다. 게다가 이미 아는대로 유택은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서, 반드시 도로교통법을 준수하고, 길모퉁이를 돌땐 직각으로 꺾어 돌고, 합리적이지 않은 것에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일흔을 바라보는 경제학과 교수였다. 그런 사람의 생활이 대체 뭐가 재미있다는 거지? 그래도 기왕 샀으니 읽기는 해야겠지, 하고 하루 한권, 이틀에 한 권 씩 천천히 읽어나가다가 드디어 5권 째, 빵 터지는 에피소드가 발생했다. 그건 만화 속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밍밍함과 유교수의 융통성은 없지만 타인이나 사물을 이해하려는 자세에 좀 익숙해져야만 터질 수 있는 웃음코드였다. 나는 그대로 그녀에게 카톡을 날렸다.
나 : 천재 유교수의 생활, 다 샀는데.
너 : 진짜? 부담되는데.
나 : 왜?
너 : 재미없으면 내 탓할 거 아냐.
나 : 그러니깐. 대체 뭐가 재미있는지 모르겠는거야. 밍밍하고
너 : ㅋㅋㅋ
나 : 그러다가 5권에 가서 처음으로 빵 터졌어.
너 : 5권에 무슨 에피소드가 있는데?
나 : 고양이 에피소드
너 : 아, 기억 안나. 읽어봐야겠다.
나 : 만화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밍밍함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절대 웃기지 않은 에피소드지.
너 : 밍밍함이 바로 그 만화의 매력이라구.
당분한 또 다른 세계를 공유한 쏠쏠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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