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Daily/일상-생각-잡담

병원일기

gowooni1 2014. 10. 17. 12:53

 

 

한 달 여 전부터 피로가 누적되었다는 느낌이 가시질 않더니 몸에 낌새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자도 피곤하고 속이 메스껍고 입맛도 없고 무얼해도 즐겁지가 않았다. 어느날 거울을 보니 급기야 눈이 노랗게 뜨고 있었다. 아, 몸에 일이 나긴 제대로 났구나. 인터넷을 급히 검색해보니 여러가지 증상이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무래도 간염과 비슷했다. 이튿날 아침에 출근하여 급한 일을 마무리하고 동네 내과에 전화를 걸어 피검사를 예약했다. 아무것도 먹고오지 말라고 하는 통에 허기지고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겨우 피를 뽑아낸 후 오후 5시에 1차적인 결과를 듣기로 했다. 다시 집에 가서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자다가 시간에 맞춰 일어나 병원에 가니 의사가 심상찮은 표정으로 말을 했다.

"정상적인 간수치는 40-50인데, 지금 환자분은 665가 넘었어요. 이후 검사는 다 환불해드릴테니 취소하시고 지금 당장 큰 병원 응급실로 가세요. 소견서 써 드릴게요."

그 길로 근처에 있는 가장 큰 병원 응급센터로 가서 다시 모든 검사를 진행하였을 때는 이미 간 수치는 1000을 넘고 있었다. 이미 심각해질대로 심각해졌는지 아니면 소견서에 그렇게 쓰여있었는지, 내 의사여부는 별로 물어보지도 않고 입원수속이 되어 닭장같은 입원실에 밀어넣어졌다. 그렇게 처음으로 입원생활을 시작하였다.

 

병원생활은 단순하기 그지 없었다. 밥 먹고, 약 먹고, 검사하고, 주사 맞고, 자기. 그렇다고 해서 마냥 편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파서 오는 사람들이 전부이니 다들 뾰족해질대로 뾰족해진 신경으로 남의 신경을 벅벅 긁는 것은 예삿일이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욕을 하며 세상에 대한 적대감을 한없이 표출해댔다. 라이프스타일이 각기 다른 사람들끼리 한 병실에 모여 있자니 누군가는 자야할 시간에 누군가는 밥을 먹고 큰소리로 대화하거나 싸운다. 좀 조용해졌나 싶어 잠이 좀 들려고 하는데 새벽 4시 반에 어김없이 간호사들이 와서 간수치를 검사해야 한다며 피를 뽑아가고 정맥주사가 제대로 들어가고 있는지 팔을 들춰가며 확인을 하고 수액을 바꾸고 아침식사 전 엑스레이를 찍고 오라고 재촉한다. 시도때도 없이 들려오는 큰 소리와 침대 위에 있는 불을 켜대는 통에 맘 놓고 한잠 푹 자보는 것이 소원이 될 지경이었다. 조금이라도 숙면을 취하기 위해 귀마개와 안대라는 방패를 마련했더니 그나마 버틸만 해졌다.

 

먹고 자고 피를 뽑고 주사를 맞고 하면 나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나의 간수치는 끝도 없이 올라갔다. 처음 응급실에 왔을 때는 1000을 넘어가던 수치가 1200, 1300, 1500, 1600 을 넘더니 입원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는 1730을 찍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A형 간염을 의심했으나 A,B,C형 반응에서 음성이 나온데다 유례없이 솟구치는 간수치를 본 주치의는 드디어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급성독성간염인데, 이 상태로 수치가 계속 올라간다면 최악의 경우에 대해서도 대비를 해야 합니다. 이틀 더 상황을 지켜보시고 그 때도 수치가 떨어지지 않으면 장기이식이 가능한 큰 병원으로 옮겨가 이식대기를 하셔야 해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안 나는 입원하고 처음으로 굳은 표정이 되었다. 장기이식이라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내 인생에서 있을거라고 생각 못 해본 단어였다. 그리고 장기이식이라는 게 말이 쉽지, 죽으면서 장기를 이식하겠다고 한 사람이 죽었을때나 기회가 주어지는 데다가 이식 대기라면 먼저 대기중인 사람들에게 이식을 하고 나서 내 차례가 왔을 때 할 수 있는 것일테고, 또 그 전에 내 간이 급격하게 나빠지거나 회복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만약 염증 덩어리인 내 간을 몸 속에 간직한 채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느냐고 의사에게 물었다.

"급성독성간염으로 갑자기 수치가 증가하게 되면 더 이상 손 쓸 방법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사태가 심각해지게 되면 대기할 새도 없이 죽기 때문에 사체간이식이 아닌 생체간이식을 해야만 살 수 있어요."

 

막연해진 얼굴로 병원 창가에 서서 환자복을 입고 주차장을 산책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주치의는 내게 산책도 금지시키고 절대안정을 요구했기 때문에 저들의 산책마저 내게는 사치였다. 기분이 조금은 이상해졌다. 나는 그냥 조금 피곤할 뿐이지 사지를 움직이며 돌아다니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는데, 그저 가만히 앉아서 수치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수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이해가 안갔다. 오히려 그날 아침은 지난주 입원할 때에 비해서 건강해진 느낌이었고 입맛도 돌아와 드디어 뭔가를 마시고 싶다는 욕구마저 처음 들었던 날이었다. 한달 여 만에 처음으로 식욕을 느낀 것이 너무 반가워서 병원 편의점으로 달려가 포카리스웨트 한캔 원샷을 했을 만큼 다른 날에 비해 가뿐하고 개운했으며 몸이 어떤 음식물을 요구한다는 사실에 신이 났단 말이다. 아침에 뜨는 태양에 피부로 햇살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이 아름다운 광경을 오늘 하루도 볼 수 있게 해준 세상과 내 건강상태에 감사했고, 식욕이 돌아와 무언가를 맛있게 마실 수 있는 기쁨을 다시 누릴수 있게 되어서 감사했고, 비록 몸이 좀 약해졌지만 덕분에 인생을 한템포 쉬어서 돌이켜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것에 대해서도 감사했고, 인생을 멀리 보고 진정 중요한 일과 우선순위를 재정비 하라는 의미로운 휴식을 취하게 되어서도 감사했으며, 바쁜데에도 불구하고 문병을 위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오는 사람들에게도 감사했는데.

"의사들은 보통 최악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편이니까 너무 신경쓰지 않는 것이 좋아. 일단 이틀 정도 더 두고 보자고 했다며? 그때까지는 그냥 마음 편히 푹 쉬어."

A형 간염으로 열흘간의 입원 경력이 있는 친구 한 명이 해주는 위로를 듣고 그나마 마음을 가라 앉혔다. 가볍게 마음 먹기로 했다. 이식을 해도 살 수 있는 건데 뭐, 죽는 것도 아니고.

 

하루 전 느낀 컨디션의 가뿐함은 이틀 뒤에야 몸 상태에 반영이 되었다. 드디어 수치가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워낙 높게 치솟은 수치인지라 빨리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흠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건 간이 곧 회복력을 되찾았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온 몸에서는 열이 났고 머리가 아팠으며 찬 바람도 쐬지 않았는데 감기까지 걸리고 세수할 때마다 코에서 피가 줄줄 났다. 이를 닦을 때에도 칫솔질을 가볍게 하는데 잇몸에서 피가 자꾸 났고 체온은 수시로 오르락내리락했다. 회복주도권을 되찾은 내 간은 아직 뒤통수를 보이지 않은 염증군단을 퇴치하기 위해 전 병력을 동원해서 마지막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의사는 한번 회복세를 찾으면 금방 떨어지기 시작하지만 아직은 안심할 단계가 아니라며 절대 안정태세를 요구했다. 나는 으슬으슬한 몸을 감싸 안으며 염증군단이 어서 뒤통수를 보여서 줄행랑치기만을 기다렸지만 괜히 독성급성간염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아닌지 그 세력이 한풀 꺾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을 버텨야 했다.

 

 

이제 내 몸 하나 건사할 만 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는 참으로 아픈 사람들이 많았는데-하긴 입원까지 할 정도면 정말 아픈거긴 하겠지만- 유난히 많은 부류는 바로 할머니들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할머니라는 사람들과 가까이서 지내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이건 분명 새롭다면 새로운 경험이었다.

병실에 입원한 할머니들은 거의 80을 넘긴 사람들이어서 78세만 되어도 젊은 느낌이 났다. 가장 나이가 많은 할머니는 85세. 이 할머니는 유일하게 할아버지가 살아계신 분이었는데 이미 거동을 혼자 할 수 없고 음식도 거의 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 할아버지는 86세로 홀로 음식도 잘 드시고 거동도 잘 하시는 분이었으나 매일 아내의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슬퍼했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임자랑 만나서 같이 한 세월이 62년이야. 내가 오늘도 성당가서 기도하고 왔어. 죽어서도 내가 임자만 사랑할 거라고. 다음에 만나면 더 잘해줄거라고, 더 사랑해주겠다고. 임자 죽으면 나도 곧 따라갈테니까 너무 외로워하지 말고 있어."

할머니는 어느날 동공이 풀린 눈으로 밤새 영감, 영감, 하고 외치더니 다음 날 1인실로 옮겨갔다. 그 할머니는 유일하게 남편과 사별하지 않은 할머니였다.

 

두번째 할머니 역시 85세. 그 이후 할머니들은 전부 남편과 사별하고 며느리나 딸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다 퇴원했다. 두번째 85세 할머니는 첫번째 85세 할머니와는 달리 홀로 화장실도 잘 가고 한가득 나오는 병원밥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다 드신 후 가볍게 운동까지 하며 소화를 하는 놀라운 건강을 선보였다. 1인실로 옮긴 할머니와 도저히 같은 세월을 살았다고 볼 수 없을만큼 건강한 이 할머니는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며 살뜰하게 대하는 막내 며느리와 함께 퇴원했다.

 

세번째 할머니는 83세. 이 할머니는 조금 특이하면서도 전형적인 캐릭터였는데. 귀가 조금 안 들리다 뿐이지 할 말 못 할 말 다 하며 거동도 쉽게 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뭐에 심사가 뒤틀렸는지 큰 며느리만 오면 더욱 귀가 안 들리는 척 하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 척 하며 더욱 아픈척을 하다가도 하나 뿐인 딸이 오면 큰 며느리 흉을 굉장히 정정한 목소리로 감정을 다 실어가며 밤새도록 시끄럽게 봤는데, 어찌보면 인생의 낙을 잃어버려 남아도는 노후시간을 어쩔줄 몰라 당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네번째 할머니는 78세. 할머니는 그녀, 라는 수식어가 어울릴만큼 말을 예쁘게 하고 귀엽게 하는 분이었다. 딸들도 엄마를 닮아서 할머니를 포함한 세 딸 총 4명의 여자 말투가 비슷비슷했는데, 하루종일 끊임없이 조잘조잘대는 모녀들이었다. 할머니는 면역력이 극도로 약해져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누워 티브이만 보면서도 병실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욕을 하는 사람들에게 싫은 티 하나 내지 않으며 오히려 재미있는 사람들이라고 웃어 넘기는 마음의 여유로움까지 간직한 사람이었다. 긍정적이긴 하지만 더 이상 인생을 길게 가고 싶어하지 않는 새까만 관조의 눈동자가, 아직은 건강하고 오래 살고 싶어하는 내게는 애틋해보였다. 아니면 그녀가 느낀 나에 대한 애틋함이 전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섯번째 할머니는 81세. 요양병원에서 죽을날을 기다리며 누워있다가 C형 간염 증세를 보여 일반 병원으로 입원한 할머니였다. 81세 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흔살은 넘겨보이는 굉장한 몸이었다. 그간 더 나이 많은 할머니들의 정정한 모습을 봐와서 상대적으로 더 늙어보이는 것이겠지만, 할머니는 이미 몸을 혼자 뒤척이지도 못해 욕창을 달고 살면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오른팔과 눈동자와 입으로 세상을 봤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 할머니가 내 옆에서 칸막이나 다름 없는 커튼을 오른팔로 살짝 걷어내 내 동정을 살피는 모습이 살짝 무섭기까지 했다.

 

자, 이제 나는 그들에게 없는 50년의 시간이 있다. 하늘이 돕고 운이 좋아 무사히 그 50년의 세월을 건너갈 수 있다면, 나는 이제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어떤 쓸데없는 욕심을 버릴 것인가? 내 인생을 좀먹는 허례허식은 무엇인가? 느리고 천천히, 주어진 시간을 음미하며 살기로 결심을 했다면 이제 매일을 즐겁게 누리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더 이상 내가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이상한 사명감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 이상한 사명감이 나를 뒤쫓으며 조바심을 불러일으킨다면, 그 마음을 먼저 잘라내고 내가 진정 원하는 마음가짐과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무엇인지 되짚어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