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을 한 후 4개월이 지났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두툼하게 입었던 롱패딩에서 가벼운 반팔로 출근 차림이 바뀌어 있었다. 바람이 따뜻해지고 온 세상에 나무 이파리들의 연한 녹색과 철쭉의 하얗고 붉은 색이 덧입혀 있었다. 곧 여름이 오겠다.
지난 4개월은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새로운 역할들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하는 나날들이었다고나 할까. 새로운 업무와 사람들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늦은 오후가 되면 아기를 데려와 놀아주고 밥 먹이고 목욕시키고 재우느라 정신없었다. 그렇게 잠이 들어도 아직 16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기인지라 밤에 시도때도 없이 깬다. 복직 초반에는 겨우 돌이 갓 지나서 배가 고파서 깨는 것 같았다면 16개월이 지난 지금은 뭐가 무서운지 엄마를 확인하느라 깬다. 떼를 쓰는 양상도 바뀌고 우는 연기를 하는 것도 가지각색으로 늘었다. 점점 레벨업을 하고 있는데 엄마인 나는 정작 그 속도에 적응하지 못해서 쩔쩔 맨다.
복직하기 직전에는, 이제 남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자기 중심을 잘 잡을 자신이 있었는데 그건 혼자 지내고 있을 때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휴직 중에는 워낙에 만나는 사람들이 제한적이다보니 타인과 나의 삶을 비교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별로 없었다면, 복직을 하고 나니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쉽게 비교해버리고 좌절하고 낙담했다. 아기를 낳고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좀 더 초연해진 줄 알았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여전히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고 쉽게 침울해진다. 사회적인 레벨도 아직 쪼렙이다.
그러다 문득, '아, 더 이상 이래선 안되겠어. 언제까지 이렇게 힘들다고 징징거리면서 살아갈 수는 없잖아.'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 인정할 것을 인정하자면, 사실 지금은 힘든 시기가 맞는 것 같다. 아직 아기는 어리지, 일은 점점 쌓이고 감당해야 할 역할은 늘어가지, 시간은 늘 부족하지, 더구나 잠도 항상 부족하다. 가끔 마음맞는 사람들끼리 저녁에 한잔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고 싶어도 그러자면 아기는 누가 돌보나 하는 걱정 때문에 시간을 내는 것이 힘들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래도 내겐 복귀할 수 있는 직장이 있고, 조금 일찍 퇴근해도 이해해주는 동료들이 있으며, 함께 한잔 기울이고 싶을 만큼 괜찮은 사람들이 있고, 아기 돌보는 일을 함께 공유하는 남편이 있다. 비록 감기로 콧물을 달고 살지만 아직까지 아기는 큰 탈없이 자라고 있으며, 떼 쓰는 게 날로 업그레이드 된다는 건 아기가 잘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오늘은 아기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어린이대공원에 다녀왔다. 요새 아기는 유모차에 앉기를 거부하며 모든 곳에 자기가 직접 가보고 싶어한다. 새로 돋아나는 잎사귀들과 꽃잎들을 건드리며 즐거워하고 모든 계단을 직접 오르내리고 싶어한다. 덕분에 어딜가든 남편이나 내가 졸졸 쫓아다녀야 하는데 그러자니 늘 스포티한 차림만 입게 된다. 우아한 복장의 엄마가 되는 것이 출산 전의 작은 소망이었는데 당분간은 꿈도 못 꿀 일이다. 멀리서 아기를 졸졸 쫓아다니는 남편과, 모든 것을 만져보겠다고 뽈뽈뽈 뛰듯 걷는 아기를 보면서 갑자기 이 정도면 됐다,는 만족감이 일었다. '모든 불만은 만족을 모르는 데에서 오나니, 만족할 수 있으면 언제나 즐겁고, 욕망하는 자는 언제나 마음이 어지럽다'는 어떤 책에서 읽은 구절이 떠올랐다.(이 구절이 정확히 맞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뉘앙스였다)
지금이라도 나의 삶을 되짚어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만큼의 여유라도 생겨서 다행이다. 이제는 좀 더 마음을 정돈하고 만족하는 사람이 되어 아기의 성장과정을 오롯이 누리고, 업무 능력이 향상되는 즐거움과 관록을 쌓는 즐거움을, 그래서 나 자신을 더욱 믿는 마음을 깊숙이 다져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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